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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4.14 09:07

사랑과 전쟁2 "아들을 위하여, 종교의 차이가 아닌 배려의 차이..."

자신조차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에 대한 충분한 고려와 배려가 필요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많은 사람들이 잘못 오해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동기가 선하면 그 결과도 선하다. 결과에 이르는 과정 또한 선하다. 하지만 개를 끔찍이도 아끼는 사람에게 몸에 좋다고 개고기를 몰래 속여서 먹이는 것이 과연 선의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옳은 행동이었을까?

물론 아내 유신애(민지영 분)의 입장도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정하게 된다. 연민하게 된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무속인인 어머니가 싫어서 아예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녀더러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무속인이 되라 한다. 무속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속인의 딸이었기에 그녀가 겪어야 했던 많은 일들이 아직 그녀의 기억속에 생생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아이인데 엄마가 되어 아이가 위험하다는데 그냥 보고 있을 수만도 없다.

그러나 엄마 유신애란 또한 아내 유신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며느리 유신애이기도 하다. 엄마로서의 의무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아내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며느리로서도 시부모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어째서 그녀는 굳이 남편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비밀리에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되었을까?

그녀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이 그녀를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남편과 시부모 모두 결코 그녀의 선택과 판단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한 마디로 남편과 시부모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을 그녀는 한 것이었다. 뻔히 알면서도 그와 같은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비밀리에 그것을 행동에 옮겼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남편과, 그리고 시부모가 받게 될 충격이란 어떠하겠는가?

물론 관용은 중요하다. 서로 믿는 신이 다르고, 따르는 가르침이 다르더라도 그것이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또 다르다. 채식주의자에게 고기를 먹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개를 끔찍이도 사랑해서 개고기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 앞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그 또한 대단한 결례일 것이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이제부터 고양이를 기르려 하니 참아달라 강제할 수 있을까? 종교란 기본적으로 불관용의 영역이다. 유일신이 둘이 될 수도 없고, 유일신의 가르침이 다시 둘이 되어서도 안된다. 그런데 교리에 어긋나는 것을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종교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라는 소리다.

그런 집안인 것을 알고 결혼을 했다. 그런 사람인 것을 알고 그녀도 결혼을 했다. 그래서 이제까지 그녀 또한 충실한 종교인으로서 남편과 시부모들과 함께 하고자 노력해 왔었다. 그렇다면 남편과 시부모에게도 적잖이 충격이고 상처가 될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미리 알리고 상의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남편과 시부모의 관용에 기대기보다 그들이 관용할 수 없는 특수한 사정을 이해하고 그들로부터 사전에 이해와 동의를 구했어야 했다. 그래도 안된다면 어쩔 수 없이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다른 길을 모색한다. 멋대로 아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결론을 내리고 행동으로까지 옮기고 난 뒤 이미 결론이 그렇게 났으니 받아들이라. 이 또한 일방적인 이기이며 에고일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몇 년을 시부모와 며느리로 함께 살아왔는데 바로 앞에서 마귀가 부르다니. 어머니와 자식 사이인데 남들의 눈이 무섭다고 억지로 떼어놓으려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그래서 오해도 하게 된다. 시어머니가 아들인 남편을 위해 그토록 부정하던 부적을 받아오고 굿을 하려 하는 모습에서 아들을 위해 무속인의 길을 받아들인 아내의 선택을 긍정하려는 시도를 보게 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사람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이라는 것이 있다. 인정할 수 있는 한계라는 것이 있다. 이미 유신애 자신이 알고 있는 바 그대로다.

유신애 자신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결정이었다. 처음 무속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었던가? 거부하고 부정했다. 심지어 온갖 악다구니를 퍼붓기까지 했었다. 결국 아이에게 해가 돌아간다는 말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녀 자신도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힘든데 그녀보다 더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던 남편과 시부모의 입장은 어떠했겠는가? 느닷없이 그와 같은 사실과 마주하게 된 그들의 놀람과 당황이란 과연 어떠하겠는가?

그녀 자신이 남편과 시부모에게 준 충격부터 먼저 이해해야 한다. 어머니의 존재와 무속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숨긴 채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납득할만한 부분이 있다. 그녀 자신이 무속인이 어머니를 싫어한다. 어머니와 더불어 무속인이라는 직업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서도 신앙심 깊은 집안의 일원으로서 항상 최선을 다해왔었다. 그로 인한 신뢰도 깊었다. 그러나 너무 갑작스러웠다. 너무 일방적이었다. 모든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을 때 그들에게는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토록 그녀를 사랑하던 남편조차 혼란속에 그녀를 거부하고 만다. 그런데도 그녀는 마냥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려 한다.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데 오로지 그녀 자신의 입장만을 강조하려 한다. 일방은 충돌을 불러온다. 모든 갈등의 원인이다. 누구의 잘못일까? 합리적인 대화로서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분명 있었다. 자신이 그것을 포기했다.

아무튼 보면서 가장 부끄러운 점이라면 타인의 직업을 가지고 함부로 단정짓고 결론내리려는 아주 안좋은 우리 사회의 오지랖일 것이다. 당사자의 직업도 아니다. 당사자의 직업이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데 어머니의 직업으로 인해 딸의 운명까지 결정지어진다. 남들 보는 눈이 무서워서 어머니와 자식을 억지로 떼어놓아야 한다니. 그로 인해 딸은 어머니를 부정하려 하고, 사위는 장모더러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 말한다. 그랬다면 지금의 상황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행복하고 정겨운 웃음이 단지 종교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다면 결국 그것이 원인이 된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알고 결혼을 했다. 납득하고 받아들였다. 바로 직전까지 그녀 또한 독실한 신자였다. 그런데 신내림을 계기로 모든 것이 뒤바뀌고 만다. 성급한 판단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아가 버렸다. 누구의 탓이었을까? 종교가 아닌 배려와 신뢰의 문제다. 누구를 위해서였을까? 선의를 맹신할 때 오해는 더 깊어지고 갈등도 커진다.

안타깝다. 그래서 사소한 오해가 문제를 키운다. 서로가 모르는 작은 비밀이라도 가지게 되었을 때 사이가 멀어지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미 알고 있었다. 아직 모르고 있었다. 노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다. 종교는 매우 예민한 부분이다. 생각이 많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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