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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4.11 09:16

패션왕 "절망하는 젊음, 강영걸 사랑을 붙잡다."

정재혁에 대한 증오와 이가영에 대한 연민 속에서 강영걸 빛을 선택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젊음이란 분노다. 좌절이다. 절망이다. 욕망하는 것이 있다. 믿고 싶은 것이 있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이 욕망하고 믿고 지키고자 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문득 쇼윈도우 너머로 고급 외제자동차를 본다. 그가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갖고 싶다. 그러나 가질 수 없다. 차라리 포기할 수조차 없는 욕망이 그렇게 절망이 된다. 좌절하며 증오로 바뀐다. 자신을 옭죄는 세상이 원망스럽다. 차라리 부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욕망할 수밖에 없다. 욕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로부터 비롯된 가난이 아니었다. 안다. 고모를 원망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교도소에서 애써 일해 받은 얼마 안 되는 돈을 오랜만에 찾은 고모에게 모두 건네고 돌아온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자신들을 버렸고, 아버지가 다시 자신들을 버렸다. 자신은 가난을 이기고자 동생을 버렸다. 동생은 병으로 다시는 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다. 돈만 있었다면.

그가 가장 욕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포기하기에는 지금까지의 그의 삶이 너무나 가엾다. 죽은 동생이 너무 가엾어 견디지 못한다. 이가영(신세경 분)은 죽은 동생의 대신이다. 어린시절 처음 보았던 그녀의 모습은 버려진 자신들과 닮아 있었다. 오갈 데 없이 자신을 찾아와 기대는 그녀의 모습은 차마 그가 보살피지 못했던 죽은 여동생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를 지키고자 한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성공해야 한다.

강영걸(유아인 분)이 그렇게밖에는 살아갈 수 없는 이유였다. 절망은 원망을 낳고 원망은 증오를 낳는다. 자기가 갖지 모든 것을 그는 욕망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기가 갖지 못한 것들을 가진 이들을 질투하고 원망한다. 절망이 투사된다. 좌절이 투영된다. 그들의 탓이다. 그것은 모멸감이기도 하다. 자괴감이기도 하다. 자신은 이렇게밖에는 하지 못하는 것인가? 더욱 굴절된 그의 자아는 비틀리고 뒤틀린 채 왜곡된 세상을 담아낸다. 왜곡된 자아가 왜곡된 세상을 담는다.

강영걸이 정재혁(이제훈 분)을 증오하는 이유다. 그는 자신이 갖지 못한 모든 것을 가졌다. 그것은 원래 자신이 가졌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미국땅을 떠돌며 당장의 한 끼가 아쉽던 절박한 상황에서 그는 그것을 깨닫는다. 당장 간절한 한 끼조차 거절하는 정재혁에게서 자신이 누구를 원망하고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 비참했던 시간들이 더욱 그 증오를 돌릴 대상을 찾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정재혁의 탓이다. 그렇게 스스로 납득하며 버티는 수밖에 없다.

욕망하는 만큼 절망 또한 깊다. 희망하는 만큼 좌절 또한 더욱 깊다. 믿음이 있다. 확신이 있다. 자신도 있다. 그러나 두렵다. 불안하다. 초조하다. 헛된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그는 욕망하며 희망을 갖는다. 믿음을 갖고 확신을 갖는다. 자신을 다독인다. 그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불신과 동요가 그를 어둠으로 내몬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단계에서 꺾이고 만다. 다행히 그에게는 이가영이라는 구원의 빛이 있다. 정재혁에 대한 증오가 어둠이라면 이가영에 대한 집착은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빛이다.

이가영은 자신을 필요로 한다. 그녀를 보살펴야 한다. 그녀를 지켜주어야 한다. 그녀가 자신이 가진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말했듯 이가영이란 강영걸에게 죽은 여동생의 대신이다. 그래서 강영걸은 이가영에게 응석도 부릴 수 있다. 아무렇게나 말하고 상처입힐 수 있다. 자신의 것이다. 온전한 자신의 것이다. 그를 위해서라도 그는 더욱 독기를 벼려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라도 그녀를 지키기 위해 세상과 타협해야 했다. 정재혁에 대한 증오조차 이가영에 대한 그의 집착을 이기지는 못했다.

팽팽한 균형이었다. 정재혁 - 아니 아직 그가 갖지 못한 그가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원망과 증오와, 이가영이라고 하는 그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어떤 가장 소중한 것과의 사이에서. 그를 집어삼킨 어둠과 그럼에도 그를 지탱하고 있는 한 줄기 빛과의 사이에서. 무승부였다. 아니 사실상 이가영의 승리였다. 비록 이가영을 위해 정재혁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그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대신 그는 자존심을 꺾었다. 증오를 포기했다. 굴욕적으로 정재혁에게 매달려 동업을 구걸했다. 그는 마침내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었다.

아마 그것은 강영걸과 정재혁이라고 하는 서로 다른 두 인물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이었을 것이다. 강영걸과는 달리 정재혁은 항상 빛속에 머물고 있었다. 이미 그에게는 강영걸이 갖지 못한 많은 것들이 주어져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그 모든 것들을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당당했다. 항상 당당하고자 했다. 최안나(유리 분)에 대해서도. 이가영에 대해서도. 그리고 강영걸에 대해서도. 그래서 그는 또한 강영걸을 경멸했다. 비루하고 비굴하기까지 한 강영걸의 모습은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기에.

그러나 지켜야 했다. 자신을. 그리고 최안나를. 이가영을 탐욕하고 있었다. 그토록 얕잡아보던 강영걸로부터 패배의 굴욕까지 맛보아야 했었다.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강영걸을 선택한 이가영에게, 그리고 자신과 최안나를 지키기 위해 그런 이가영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스스로의 비열함에, 한 가지를 지키기 위해 다른 한 가지를 놓아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루지 못할 바람과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그것에 그는 처음으로 절망과 질투를 느꼈다. 그가 굳이 강영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 이가영과 함께 만난 자리에서 투정을 부린 것이 그래서였다. 그렇게라도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오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가영의 당당함으로 인해 더 큰 절망으로 좌절로 바뀌고 만다.

하기는 그것은 이미 정재혁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절망이고 좌절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있었다. 항상 그를 짓누르며 지배하려 하던 아버지가 있었다. 그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려 드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는 단지 아버지의 아들에 불과할 뿐이었다. 어머니의 아들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자체명품브랜드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최안나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온전한 자신의 것이어야 했으니까. 온전한 자신의 것이 그에게는 간절히 필요했을 테니까. 그 억눌린 절망과 좌절이 강영걸로 인해 뒤틀리고 이가영으로 인해 일그러진 채 그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짓밟힌다. 가장 상처입은 것은 정재혁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상처입고 집을 나서려는 최안나를 붙잡고 마는 것은 그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아마 최안나 역시 정재혁에게 남은 감정이란 미련과 집착에 불과할런지 모른다. 그녀가 지키고 싶던 그녀의 자존심이다. 그녀가 정재혁으로 인해 받아야 했던 모든 수모와 굴욕이었을 것이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이대로 포기하고 물러설 수는 없다. 그럴수록 상처받는 것은 최안나 자신이다. 그럼에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고집과 오기가 그녀로 하여금 버티도록 만든다. 그녀는 더럽혀지고 있다. 그녀 자신에 의해 더럽혀져가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스스로 납득한다. 과연 그녀는 웃을 수 있을까? 마지막 순간 진정으로 행복한 기쁜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악역이라기에도 그녀는 너무 존재감이 없다.

느와르의 잿빛화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방에서 빛이 들이치는 밝은 사무실에서조차 깊은 어둠인 듯 화면은 어둡기만 하다. 사람이 어두워서다. 마음이 어두워서다. 모두가 어둠에 사로잡혀 있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꿋꿋한 것이 이가영이다. 유일하게 그녀만이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녀만이 오로지 증오가 아닌 희망을, 질투가 아닌 진실을, 분노가 아닌 사랑을 간직한 캐릭터인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래서 왜곡됨 없이 투명하고 올곧다. 강영걸과 정재혁의 일그러진 추한 모습마저 아무 편견없이 그녀의 세상에 담기고 만다. 그들이 이가영에게 이끌리는 이유다. 그녀가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이유일 것이다.

캔디형 여주인공이라는 말의 원래 뜻일 것이다. 순수하다. 올곧다. 그래서 왜곡됨 없이 그녀는 세상을 자신의 눈에 담아낼 수 있다. 그녀를 통해 왜곡된 세상을 비쳐볼 수 있다. 그런 자신을 본다. 그런 자신을 일깨운다. 그로 인해 모두가 잊고 있던 순수를 일깨운다. 원래의 선량함을 되찾게 된다. 모두가 착해지면서 비로소 화해할 수 있게 된다. 순리로써 갈등을 풀어간다. 정재혁과 최안나 또한 이가영이라고 하는 올곧은 순수한 빛에 이끌리게 될까? 예감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너무 복잡하다. 난잡할 정도로 길다. 그만큼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방대한 때문일 것이다. 강영걸만 하더라도 고작 말 몇 마디만으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굳이 긴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그래서 지친다. 과연 강영걸이란 누구인가? 말이 너무 많았다. 좌충우돌 성장기라기보다 주요인물들의 내면을 쫓는 심리드라마의 성격이 강하다. 작가가 욕심을 너무 부렸다. 시청자가 오해하더라도 할 말 없다. 오해하지 않도록 쓰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다. 그럼에도 인물들의 묘사에 강한 설득력이 있는 것은 작가의 역량일 것이다. 그 점은 인정한다. 납득한다.

마지막 마침내 뉴욕에서 마이클의 전화가 걸려온다. 강영걸이 굳이 뉴욕까지 가야 했던 가장 큰 이유다. 강영걸에게 허락된 단 한 번의 기회다. 강영걸과 정재혁은 완전히 갈라섰다. 이가영의 마음 또한 분명해졌다. 정재혁의 자살골이다. 본격적인 드라마가 시작될까? 기대해 본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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