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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6.09.28 07:58

[김윤석의 드라마톡] 구르미 그린 달빛 12회 "보고만 있어야 하는 무력감, 시련이 운명처럼 다가오다"

보호받는 전형적인 여주인공, 운명에 휩쓸리는 소년소녀의 순수한 사랑에 이끌리다

▲ 구르미 그린 달빛 ⓒK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구르미 그린 달빛. 어쩌면 아주 오랜만에 보는 오로지 지킴받는 전통적인 여주인공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아무리 능력이 있어봐야 어차피 내시에 지나지 않았다. 내시가 아니더라도 당시 조선시대에 한낱 아녀자가 그것도 한 나라의 세자 앞에서 감히 나랏일을 말한다는 것은 상당히 무엄한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세자(박보검 분) 자신이 홍라온(김유정 분)에게 지금껏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있었다. 그저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는 한 송이 고운 꽃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그동안 홍라온이 사랑하는 세자를 위해 했던 의미있는 일이란 중전(한수연 분)의 사주로 공연 직전 도망친 무희를 대신해서 무대에 올라 춤을 추었던 것이 전부였다. 어떤 조언도 하지 못했고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홍라온으로 인해 세자가 곤란한 일을 겪는 경우가 더 많았다. 심지어 홍라온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위험에 노출되기도 했었다. 이번에도 감히 임금이 사는 궁궐의 담을 넘어 칼을 든 자객들이 난입했는데 홍라온 하나 지키겠다고 손에 든 칼마저 놓아버리고 있었다. 홍라온을 내리치려는 자객을 막느라 틈을 보인 탓에 그만 칼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모습을 마냥 눈물만 흘리며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홍라온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

드라마를 보는 내내 느끼고 있던 정체모를 답답함의 정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만 한다. 그저 곁에 있으며 주인공과 사랑만 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지켜진다. 세자는 물론 당당한 세도가의 일원인 김윤성(진영 분)마저 홍라온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힌다. 그것도 정면으로 겨루어 실력으로 상대를 쓰러뜨린 것이 아닌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상대를 꾀어낸 뒤 몰래 기습하여 목숨만 빼앗은 것이었다. 말 그대로 암살이었다. 그것도 고작 한 여인을 위해 한낱 집안을 위해 심부름이나 하는 하찮은 사내의 비천한 피를 직접 자기 손에 묻히고 있었다. 도대체 홍라온이라는 여인이 누구이길래 존귀한 신분의 두 사내로 하여금 이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도록 만드는 것인가.

아마 남성시청자와 여성시청자가 바라보는 방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시청자라면 당연히 여자주인공인 홍라온에게 자신을 이입하기가 쉽다. 반면 남성시청자라면 홍라온보다 홍라온에 마음을 빼앗긴 다른 두 사람의 남자에게 자신을 이입하기가 더 쉽다. 서로의 시야에 여성인, 혹인 남성인 자신은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상대만이 보인다. 홍라온의 입장에서 본 세자 이영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사내다. 듬직하고 사랑스럽다. 기대고 싶으며 한 편으로 안아주고 싶다. 김윤성 역시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올곧고 단호한 성품을 보여준다. 역시 남자다. 그에 비해 남성시청자의 입장에서 보는 홍라온의 모습은 어떠한가. 사랑하는 모습도 사랑스럽고, 눈물흘리는 모습도 매력적이지만, 그러나 그 뿐. 과연 홍라온이 누구냐 묻는다면 그저 눈에 띄게 예쁘고 매력적인 소녀라 말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운명에 이끌려 내시가 되고, 우연이 이끌어 세자와 만나 인연을 맺고, 우연히 만난 인영으로 인해 지금껏 보호받고, 그리고 겨우 행복해지려는 순간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들로 위험에 빠진다. 홍라온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써 10년 전 아버지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면서 그녀의 운명은 정해지다시피 했다. 여전히 권신 김헌(천호진 분)과 그의 일파가 홍경래의 유일한 혈육인 자신을 쫓고, 역시 홍경래의 뜻을 이어받으려는 이들이 백운회를 만들어 그녀를 맞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만 하며 살고 싶은데 어머니마저 운명의 무게에 겨워 딸과 함께 멀리 도망치려 한다. 그것이 핵심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찾아온 시련들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헤쳐나가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게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나고 자신마저 휩쓸어 버린다.

덕분에 홍라온의 역할이 사라진 대신 세자와의 갈등을 거의 도맡다시피 하는 것이 권신 김헌(천호진 분)과 그의 무리들이다. 매번 싸우고, 매번 부딪히며, 매번 서로를 위협으로 적으로 인식한다. 세자와 홍라온의 사이만으로는 드라마를 끌고 가기에 충분한 긴장과 갈등을 만들 수 없기에 권신의 전횡으로 왕권이 위축된 시대의 배경이 그 긴장과 갈등을 대신하게 된다. 김헌과 싸우고 홍라온에게 위로받는다. 김헌과 권신들에게 상처받고 홍라온에게 치유받는다. 거의 전부다. 차라리 홍라온은 세자에게 어머니 대신이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기대고 싶은 모성에 대한 갈망이 홍라온이라는 여성을 향하게 된 것은 아닌가. 권신 김헌과 그 무리들과의 첨예한 갈등에 비해 홍라온과의 사랑은 그저 달달하기만 할 뿐 무척 심심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나마 백운회까지 나서니 두 사람의 앞날이 걱정되고 긴장도 된다.

과연 그 와중에도 세자는 홍라온더러 자신의 곁에 있으라 명령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홍라온은 세자의 곁에 남으려 한다. 하지만 그들의 굳은 결심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미래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기에는 세자나 홍라온이나 아직 너무 작고 무력하기만 하다. 세자만 바쁘다. 정확히 세자에게 조언을 해주는 다산 정약용(안내상 분)만 바쁘다. 조금은 달라지게 될까? 홍경래의 딸이라는 자신에게 지워진 운명의 무게를 알게 된다면 지금과는 달라진 조금은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들의 사랑은 그로써 결정되지 않을까.

물론 아직 소년들이다. 아직 소녀들이다. 벌써부터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것도 무리이기는 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이 무언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훌륭한 일들을 해내서 지금껏 사람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사랑만해도 그들은 아름답다. 그저 열심히 사랑만 해도 그들은 사랑스럽다. 더 큰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드라마가 아니라 로맨스 드라마다. 사랑하는 이야기다. 아직 어린 그들이 사랑하는 이야기다. 다시 시련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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