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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6.09.27 09:02

[김윤석의 드라마톡] 구르미 그린 달빛 11회 '세자의 성장, 오히려 사랑을 위해 더 무거운 짐을 지다'

사랑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왕이라는 시련이 그들을 시험하다

▲ 구르미 그린 달빛 ⓒK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구르미 그린 달빛. 하지만 그럼에도 왕이 항상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불안에 떨어야 하는 것은 그 어깨에 지워진 짐이 너무 크고 무겁기 때문이다. 당장 자신이 물려받은 왕위야 말로 누군가 나라를 세우고 대를 이어 왕위를 지켜온 결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역시 장차 왕위를 물려받게 될 자식과 그 자손들을 위해 온전히 왕위를 지켜낼 책임이 있는 것이다.

왕이 왕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조차 나이들어 몸이 불편해지자 그 빈틈을 노려 아들 이방원이 오랜 친구이기도 했던 다수의 공신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단종 역시 아직 어린 나이이기는 했지만 스스로 자신의 왕위를 지키지 못하니 수많은 충성스런 신하들과 종친들, 심지어 백성들마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야 했었다. 더구나 정통성없이 오로지 실력으로 왕위에 올랐기에 그동안 쉽지 않은 길을 자신을 도와 함께했던 이들에 대한 보상이 뒤따르게 된다. 결국 나라의 곳간을 헐어야 하고, 심지어 백성들의 재산까지 약탈해야 한다.

그저 왕 한 사람 바뀌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왕이란 전근대 왕조에 있어 곧 정체성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왕이야 말로 한 나라를 지탱하는 명분이고 지켜야 할 정의였으며 결국 모든 것이었다. 왕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 명분도, 정의도, 가치도, 윤리도 모든 것이 왕과 함께 바뀌게 된다. 충신은 역적이 되고, 바른 선비는 죄인이 되어 끌려가며, 오히려 왕을 배신하고 눈치나 보던 이들이 새로운 왕을 도와 공신이 되어 권력을 가지게 된다. 백성들 위에 군림하게 될 관리마저 모두 그 과정에서 바뀌고 마는 것이다. 법도, 제도도, 사람도 모두 바뀌는데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왕이라고 남의 일이 될 수는 없다.

보다 극단적으로 외적이 쳐들어와서 전쟁이 한창인데 왕이 도망도 치지 못하고 잡혀서 죽었다. 살기는 살았는데 아직 전국에서 수많은 신하와 백성들이 목숨걸과 적과 싸우고 있는데 혼자서만 덜컥 적장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해 버리고 말았다. 아니 적으로부터 무사히 도망치기는 했지만 신하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에 살해당하거나 유폐되어 왕위를 빼앗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물론 새로운 왕이 이전의 왕보다 더 현명하고 더 뛰어날 수는 있다. 더 인품도 능력도 훌륭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모든 백성과 신하들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왕에 복종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자성이 마침내 북경을 함락하고 숭정제를 자살케 하자 오히려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고 홍타이치에게 항복한 것이 그 좋은 예다. 그렇다면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왕이 해야 할 가장 첫째 임무는 무엇인가.

그래서 왕에게 개인이란 없다. 개인이야 하고 싶은대로 하다가 실패해도 자기가 감당하고 책임지면 그만이다. 사업에 실패해서 거지가 되더라도 자기 혼자 거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해서 평생 혼자서 늙게 되더라도 자기만 혼자가 되는 것이다. 아니다. 사장이었다면 사장 혼자 거지가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투자자와 임직원들까지 모두 거리로 내몰 수 있다. 집에서 살림만 하다가 못하는 사업을 하려 하면 자칫 나라경제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그것이 개인의 사회적 책임이다. 하물며 왕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기에는 그 지워진 짐이 너무나 무겁다. 당장 대신들의 농간으로 졸지에 역적이 되어 목숨마저 위태로운 처지가 된 어린 소녀를 위해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하든 진정으로 한 어린 소녀를 구하고자 한다면 왕으로서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 왕에게는 사랑조차 국정의 한 부분이다.

사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왕(김승수 분)도 왕으로서 썩 훌륭하게 처신하는 것이라 보기 어렵다. 권신 김헌(천호진 분)의 실력을 인정하고 스스로 낮추면서도 정작 김헌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이나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어차피 김헌이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고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그것대로 현실로 인정하고 그 안에서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 정치에는 악도 적도 없다. 용납할 수 없는 악도, 결코 손잡아서는 안되는 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만이 존재한다. 목적과 과정만이 존재한다. 그를 위한 필요와 수단만이 존재한다. 왕으로서 권신 김헌에 맞설 힘을 가지기 위해 사랑마저 포기하고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왕으로서 김헌을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김헌에 대한 감정 또한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마 다산 정약용(안내상 분)이 세자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출사를 거부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일 게다. 미처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르게 세자의 권유만 믿고 조정에 들어갔다가는 김헌 일파에 포위되어 명분없이 목숨만 잃고 만다. 자기 혼자 죽는 건 상관없는데 자칫 역적으로 몰리기라도 했다는 집안 자체가 풍비박산난다. 사람을 부를 때는 먼저 있을 자리부터 만들고서 부르는 것이 예의다. 사람을 불러 놓고서 정작 있을 자리는 알아서 만들라 한다면 절대 누구도 오지 않는다. 무모하거나, 아니면 미쳤거나. 타협이든 위협이든 무엇으로든 먼저 김헌을 납득시키고 정약용의 존재를 용납케 한 뒤에야 그를 조정에 불러들여도 불러들여야 한다. 지금 상태로는 위험하다.

그나마 끝에 가서는 어느 정도 깨달은 모양이다. 당장 사랑하는 홍라온(김유정 분)을 위해서라도 차기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로서 자신이 힘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중전이 홍라온을 무단으로 끌고가서 능욕하려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그녀를 지켜주는 것조차 버거울 수 있다. 그녀와 함께 마음놓고 행복할 수 있는 현실을 만들고서야 비로소 그녀를 자기 사람으로 맞아들일 수 있다. 왕의 사랑법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맞아들이기 위해 그를 위한 전제로써 다른 사람을 먼저 맞아들인다. 결혼은 사랑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위해 거래로써 하는 결혼을 받아들인다. 홍라온에 대한 사랑마저 장차 왕이 될 세자 이영의 어깨 위에 올려졌다. 그래서 지금은 한 발 물러선다.

상투적이지만 원래 보편이란 흔하고 뻔한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것을 공유하고 있기에 자주 쓰이고 빈번하게 보인다. 하필 정약용과도 홍라온은 어렸을 적부터 인연을 맺어 오고 있었다. 홍경래의 뜻을 이어가려는 상선 한상익(장광 분)과 세자의 스승이다시피 곁에서 그를 돕는 정약용이 모두 홍라온을 통해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당장 홍라온과 맺어지려 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간접적으로 전해준다. 역적 수괴의 딸이다. 정체가 밝혀지면 세자와의 혼인은 커녕 자신은 물론 주위까지 무사치 못할 무시무시한 신분이다. 그마저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잠시 홍라온을 멀리 두어야 한다. 그를 조건으로 홍라온이 엄마(김여진 분)과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언제까지나 철없던 세자가 마침내 한 나라의 왕위를 물려받을 국본으로서 자격을 갖춰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자기 목숨만큼이나 홍라온을 사랑하지만 조선의 세자인 자신의 어깨에는 그보다 더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다. 함부로 포기할 수도 없다. 힘들다고 내팽개칠 수도 없다. 그마저 세자로 태어난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운명이다. 그를 위해 세자 이영이 치러야만 하는 대가다. 그래서 부쩍 제법 어른스런 표정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홍라온과 있을 때는 사랑에 빠진 철없는 소년의 표정을, 김헌과 있을 때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세자의 눈빛을, 그리고 홍라온을 잠시 놓아보낼 결심을 하면서 그 두 가지가 합쳐진다. 이제는 사랑도 개인이 아닌 세자로서 해야 한다.

설마 언제까지나 이런 채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저 모두가 바라는대로 여전히 소년인 채로 사랑만 하게 될 것을 예상했었다. 그것으로 과연 충분할 것인가. 하지만 사랑도 중간에 위기가 한 번 쯤은 있어주어야 깊어지고 의미도 생긴다. 서로 너무나 사랑하고 있으니 다른 이유로도 한 번 쯤 멀어질 필요가 있다. 세자가 결심한 그때 홍라온도 결심하고 있었다.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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