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6.08.31 07:43

[김윤석의 드라마톡] 구르미 그린 달빛 4회 "알아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운명의 이유"

매순간마다 달라지는 색, 배우들의 연기와 매력에 빠져들다

▲ '구르미 그린 달빛' ⓒK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구르미 그린 달빛. 흔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한다. 원래는 불가에서 사람과 사람이 단지 옷깃만 스치는 것에도 5백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 1겁이란 하나의 우주가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시간이다. 백 년마다 한 번 씩 사방 40리나 되는 바위를 천으로 닦아서 닳아 없어지게 하는데 필요한 시간이라니 정말 까마득한 시간이다.

결국 뒤집어 말하면 무려 500겁이라는 시간을 옷깃조차 스치지 못한 채 인연만을 맺고서야 겨우 한 번 옷깃을 스칠 수 있는 것이다. 단 한 번, 고작 하루를 함께 여행하지 못하고 그저 스쳐지난 시간이 그 네 배에 이르고 나면 겨우 하루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인연이 운명이 되는 순간이다. 만일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미리 정해져 있다면 과거와 지금의 우연한 만남이나 무심한 스침까지 모두 그를 위한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겨우 좋은 사람과 만나 함께하게 되었을 때 지나온 시간들 가운데 무심히 지나친 순간이 있었음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놀랍고 한 편으로 안타깝겠는가. 더 일찍 만나서 지금의 행복을 더 오래 함께 누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아쉬운 순간들이 있었기에 이제부터라도 남은 시간들을 두 사람이 함께 보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모든 과정들이 운명이 된다. 운명을 위한 필연이 된다.

사랑하면서도 서로 만나서는 안되는 이유다. 스쳐지나면서도 서로를 몰라봐야 하는 이유다. 겨우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에도 그래서 서로를 놓쳐야만 한다. 미처 이루어지지 인연들이 쌓이며 운명을 심화시킨다. 만났어야 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서로 알아봤어야 하는데 알아보지 못했으며, 붙잡았어야만 하는데 놓치고 말았다. 반드시 다시 만나야 하고, 다음에는 서로를 알아봐야 하며, 이번에는 결코 서로를 놓쳐서는 안된다. 

아쉬움은 미련이 되고, 간절함은 소망으로 바뀐다. 마침내 쉽지 않은 과정들을 거쳐 두 사람의 운명이 이루어지게 되었을 때 그 성취감도 극대화된다.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마침내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먼 미래의 이야기다. 먼 미래에 보는 과거의 이야기다. 현재가 아니다. 이미 두 사람이 이루어질 것을 알면서 지켜봐야 하는 과정들이다. 혹시라도 알아볼까 조마조마하고, 혹시라도 잡힐까 설레기도 한다. 스쳐지나는 순간에 숨을 죽인다.

뻔한 이야기를 뻔하게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면서 한 편으로 놀라게 만들어야 한다.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정작 보는 순간에는 새로워야 한다. 연출의 힘이다. 조금 만 더 돈과 시간을 들일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밤이라는 시간이 아쉬웠다. 아무리 세자 이영(박보검 분)의 회상으로 도우려 해도 어두운 조명 아래 그늘진 홍라온(김유정 분)의 모습은 세자가 느끼는 감동을 온전히 전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운명이 되었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의 과거와 미래가 모이는 운명의 순간이었어야 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눈과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했다.

안타깝게 맴돈다. 거꾸로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만날 수 있다.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붙잡을 수 있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아직 인연이 다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미 인연이 다했으므로 두 사람에게 내일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순수하고 진실한 지금의 시간들이 아쉽고 서글프다. 홍라온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면서도 넘치지 않게 절제하여 표현하는 김윤성(진영 분)의 모습은 남자임에도 차라리 아름답도록 섬세하다. 그 안타까움이 자신의 비극을,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질 주인공들의 운명을 강조하는 장치가 된다. 순수할수록 불행할수록 운명은 완성된다.

권력을 사이에 둔 궁중의 모략과 음모는 그다지 대수로울 것이 없다. 그냥 주인공 두 사람의 운명을 강조하기 위한 배경이고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공인 세자를 궁지로 몰려는 악역이 있고, 그 악역으로 인해 겪는 위기가 있으며, 그 위기를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인연과 운명은 강화된다. 한 번 쯤은 위기에 몰리며 긴장이 고조되고, 다시 한 번 쯤 그 위기가 해소되며 안도와 성취감을 느낀다. 세자가 승리했다. 노회한 권신 김헌(천호진 분)을 상대로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 의미는 없다. 공식적으로 조정의 모든 신하는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왕의 신하들이다. 김헌이 감히 축사낭독을 거부할 수 없는 이유였다.

어느새 서로를 량한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어쩔 수 없이 홍라온 자신이 세자 이영과 다른 여성임을 알고 있는 홍라온이 먼저 시작한다. 아직 홍라온이 여성임을 알지 못하는 세자 이영은 홍라온이 아닌 다른 홍라온에게 이끌리고 만다. 세자와 내시다. 내시가 아니더라도 한 나라의 국본과 출신도 불확실한 비천한 신분이다.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피곤해서 잠든 모습만을 몰래 훔쳐 볼 수밖에 없다. 그를 돕는 것조차 그가 알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세자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김윤성과 함께 절박하게 몸을 감추고 숨는다. 서두애서도 말했듯 엇갈림은 운명을 위한 과정이다.

상당히 뻔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전혀 뻔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주연을 맡은 박보검과 김유정 두 젊은 배우의 놀라운 연기와 매력 덕분일 것이다. 아직 김병연(곽동연 분)은 비중이 그리 크지 않지만 김윤성 역시 틈을 비집고 마치 변속기어마냥 드라마를 변주하고 있다. 드라마의 색이 전혀 달라진다. 임금인 김승수와 악역인 권신 김헌 등 베테랑들이 등장할 때는 그에 맞게 다시 색이 바뀐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드라마를 보는 것이 즐겁다. 보는 즐거움이 있다. 어쩌면 대중드라마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 모른다.

마침내 세자 이영이 권신 김헌에게 한 방 먹였다. 그리 치명적이지는 않다. 고작 말에 지나지 않는다. 여전히 조정의 실권은 김헌 자신의 손안에 있다. 하지만 왕이라고 하는 명분 앞에 권력이 체면을 잃는다는 것은 뜻밖에 클 수 있다. 하필 청나라 사신까지 함께 하고 있었다. 홍라온은 이영을 피해 김윤성의 손을 잡고 있었다. 빠르게 시간은 흘러간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