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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3.16 10:04

해를 품은 달 "죽은 자와 행복한 자, 비극이지만 해피엔드다."

민화공주가 용서받기까지 드라마가 부족한 것이 아쉽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지난회 설(윤승아 분)의 경우도 그랬지만 민화공주(남보라 분) 역시 방향을 잃은 대본의 피해자라 할 것이다. 정확히는 허염(송재희 분)이다. 우애깊은 남매였다. 누이를 목숨처럼 사랑했고 그래서 누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 또한 누구보다 슬퍼했었다. 아버지마저 누이를 잃은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누이를 죽이는 모의에 가담한 민화공주를 용서하려 한다. 과연 가능한가?

마치 커다란 허수아비를 하나 세워 놓은 것 같았다. 굳이 비싼 출연료 들여가며 송재희라는 배우를 쓸 필요가 있었을까? 가장 하는 것이 없었다. 누이 허연우(한가인 분)의 죽음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상처를 남겼고 그럼에도 어떻게 민화공주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어째서 그는 자신의 누이를 죽이려 한 아내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허염과 허연우의 어머니 신씨(양미경 분)은 그래서 굳이 8년만에 다시 살아 돌아온 딸의 손을 부여잡고 그렇게 눈물로 말하고 있었다. 지난 8년 동안 민화공주가 허연우 대신이었노라고. 허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랑하던 누이를 그리 떠나 보내고, 아버지마저 그 뒤를 따르듯 이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세자빈으로 간택된 누이의 발병으로 왕을 속인 죄인이 되었고, 의빈이 되어 다시 법도에 따라 세상과의 교류를 차단당하면서 기대고 위로할 사람조차 거의 없는 외로운 처지였다. 그런 때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위로해주고 힘을 불어넣어 준 것이 바로 민화공주였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제대로 보여지지 않은 부분이다. 설사 결혼해서 부부가 되었다 하더라도 원래 그런 사이가 아니었는데 허염이 민화공주에 대해 그토록 간절한 마음을 가지게 된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원작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 아프도록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허염만을 살아하고 허염만을 바라보며 오로지 허염에게 사랑받기만을 바라던 맹목적일 정도로 순수한 소녀의 사랑이 피식 웃음이 새어나올 정도로 살갑게 그려지고 있었다. 단지 의리에 불과하던 부부관계에서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 끝에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오히려 그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아직 허염의 마음을 알지 못하던 때에는 조바심은 났지만 그러나 기대는 없었다. 이제는 기대하게 되었다. 허염 또한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것도 알았고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지금까지처럼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를 가져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다정한 눈으로 자신을 보던 허염이 그녀를 외면한다. 포근히 안아주던 그의 팔이 그녀를 밀쳐낸다. 차라리 몰랐다면. 차라리 아무 기대도 하기 전이었다면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허염이 누구보다 그녀의 죄를 괴로워한 이유였다.

미워해야 했다. 원망해야 했다. 용서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어쩌는가? 이미 사랑해 버렸다. 그녀에게 마음을 허락해 버렸다. 그녀를 사랑한 자체도 죄스럽다.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차라리 그녀와 함께 벌받기를 원한다. 허염이 민화공주를 용서하기까지의 시간이란 허염 자신을 용서하는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이미 민화공주를 사랑하고 있기에 민화공주를 사랑하는 자신을 용서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없었다. 그래서 민화공주만 분주해졌다. 혼자서 울고 웃는다. 기뻐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그녀는 원작에서와는 달리 세상물정 모르는 그야말로 금지옥엽 공주님이 아니다. 그녀도 알 것은 다 안다.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어째서 그것이 잘못이고 죄가 되는지, 그럼에도 사랑을 포기할 수 없기에 그녀는 죄를 짓는다. 후회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의 죄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된다. 허염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그녀 혼자서 감당해야 할 몫이다. 원작에서 차근히 여러 단계를 밟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을 드라마속의 민화공주는 그렇게 처음부터 원죄로써 짊어지고 시작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화공주에게 동정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허염이 그녀를 용서해야 하는 개연성은 되지 못한다. 여전히 허염의 민화공주에 대한 감정 부분이 빠져 있다.

결국은 지나치게 주변에 힘을 쏟은 결과가 아니겠는가? 허연우가 기억상실이 되는 바람에 멀리 돌아와야 했다. 기억상실에 더해 원작에도 없는 사건들이 추가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훤(김수현 분)과 허연우의 중심줄거리는 제대로 그려지고 있었는가. 어려서 이미 만나서 사랑을 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기억상실이 된 채 만나서 사랑을 하고, 그러면서도 감추어진 진실을 쫓는다. 이중의 로맨스에 여러 요소가 겹쳐지며 이야기만 복잡해지고 말았다. 이야기가 복잡해지면 당연히 명료함은 떨어진다.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을 다시 이야기를 더해 해결한다. 설이나 민화공주의 이야기를 풀어갈 여유란 아예 없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설의 경우도 거의 대사 아닌 해설로써 나머지를 대신했다. 양명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어가는 사람치고 말이 너무 많다. 허연우가 직접 민화공주를 찾아가 마주해야 했던 이유였다. 어차피 허염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기에 그녀가 직접 설명해 주어야 한다. 어떻게 민화공주는 용서받는가? 민화공주에 대한 원망과 용서를 정작 당사자인 허연우를 통해 들려준다. 드라마로 미처 보여주지 못한 부분들을 말로써 대신해 들려주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덕분에 정작 연기하는 배우는 진지한데 민화공주에게 하는 허연우의 말이나 마침내 노비가 되었다 면천되어 돌아온 민화공주를 용서하는 허염의 모습이란 그저 공허하기만 할 뿐이었다.

말 그대로다. 밑도끝도 없다. 드라마적인 개연성은 포기한 채 나레이션에 의지한다. 드라마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일 텐데도 전혀 설득력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드라마가 부족하다. 구성의 실패다. 조금 더 드라마적인 부분에 신경을 썼어야 했다. 해설은 대사가 아니다. 해설은 드라마가 아니다. 많이 아쉬웠던 부분이었다. 드라마 내내 그런 경향이 강했다.

아무튼 윤보경(김민서 분)이나 양명군(정일우 분)이나 마지막 그들이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길이란 죽음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을 바랄까? 무엇을 기대볼까? 어차피 아비가 역적이 되었으니 윤보경 또한 더 이상 중전의 자리를 지키고 있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차라리 왕과의 추억이라도 있으면 그것이나마 위로삼아 폐서인이 되어 쫓겨나더라도 견뎌보련만은. 죽는 그 순간에는 중전이고 싶다. 죽는 그 순간 만큼은 내쫓기기 전 왕의 아내로서 죽고 싶다. 그것만이 그녀에게 허락된 단 하나 그녀의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양명군 또한 마찬가지다. 과연 살아있는다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 있을까? 왕의 형이다. 왕에게는 왕권을 위협하는 경쟁자로서, 더구나 사대부에게는 왕권을 등에 업고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요인으로서, 그래서 조선시대 종친의 정치참여는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관직에도 나갈 수 없었다. 정치적인 발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왕실에서 내어주는 적지 않은 재산을 가지고 탕진하며 의미없는 세월을 보낼 뿐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일까? 죽어 있는 것일까? 자신의 친구가 모두 왕의 신하가 되고, 사랑하는 여인 역시 왕의 여인이 되고, 의지할 곳 없이 무위하며 버거운 삶만이 앞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진정한 삶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고, 그런 가운데 다른 누군가는 행복한 삶을 이어간다. 윤보경이 죽은 자리는 아무런 아쉬움 없이 허연우가 대신하고, 양명군이 죽은 자리는 티도 나지 않는다. 문득 기억에 떠올라 지나가는 말로 이릅도 언급해 보지만, 그러나 그리움만 남긴 자리로 남은 사람들은 그들대로 행복한 삶을 영위해간다.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 하지만 억울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이 그저 가련할 뿐이다. 그나마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누운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누군가가 있어 작은 위로나마 될 수 있을까?

일단 이훤과 허연우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니 해피엔딩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윤대형(김응수 분)과 같이 마땅히 죽어야 할 이들도 있기는 했지만 오히려 양명군이나 윤보경, 설과 같은 억울한 이들의 죽음이 너무 많았다. 도무녀 장녹영(전미선 분) 또한 결국 어쩔 수 없는 권력의 희생양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해피엔드라 한다면 죽은 이들에게 이만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일 게다. 망각이란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일 것이다.

오히려 눈물이 없기에 비극은 더욱 깊다. 어째서 불가의 자비는 슬플 비(悲)자를 쓰는가. 여상한 가운데 짓는 행복한 웃음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죽은 이들을 더욱 애닲게 만든다. 사실 원작도 읽고 나서 그다지 썩 입맛이 좋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화공주는 용서를 받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다. 그것이 해피엔드라면 해피엔드일 것이다. 즐거웠다. 여운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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