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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3.08 09:28

보통의 연애 "삶이 묻다, 사람은 어째서 사랑을 하는가?"

사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극이며 희극인 보통의 삶에 대해서, 보통의 사랑을 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드라마가 조금 - 아니 아주 많이 우스워졌다. 굳이 그 장면에서 7년 전 죽은 피해자인 한재민(권세인 분)이 사실은 동성애자였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 있었을까? 반전이란 자칫 잘못 쓰면 뜬금없고 황당해진다. 드라마가 가벼워진다. 더구나 진범에 대한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물론 굳이 그랬어야만 했던 이유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매우 적절하다. 

"보통의 연애라는 게 따로 있나요? 사랑하니까 보고 싶고, 보고 싶으니까 자주 만나고, 그런 게 다 보통의 연애죠."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동성애란 말을 꺼내는 자체만으로도 꺼려지는 금단의 것으로 남아 있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서는 안된다. 그것은 죽은 이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신여사는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과연 살인자에게 죽은 피해자 한재민의 동생 한재광(연우진 분)과 그 형을 죽인 살인자 김주평(이성민 분)의 딸 김윤혜의 사랑과 동성애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신여사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금기였을까? 다만 그렇더라도 너무 꼬았고 너무 깊이 들어갔다. 이미 한 번 까페 여주인(신동미 분)과 한재민이 원래는 사랑의 도피를 하려던 사이였음이 밝혀지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거짓이었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만큼 마치 배신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차라리 까페 여주인과의 관계를 일찌감치 드러냈다면 반전은 보다 수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것이 드라마의 주제와 닿아 있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문득 떠오르는 물음일 것이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신으로부터 벌을 받고 있던 천사 미하일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신의 물음에 다름아닌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답을 얻은 바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신이 미하일에게 다시 '그렇다면 사람은 어째서 사랑을 하는가?'라는 물음을 들었다면 미하일은 무엇이라 대답했을까?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까.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믿고 기대며, 그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얻는다. 상처가 깊을수록, 그래서 절망이 깊을수록, 도저히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좌절 속에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람은 사랑을 하게 된다. 살아가기 위해서.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 사람이 사람을 가장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래서 가장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때다. 금단이 사랑을 불타오르게 만든다.

형이 죽었다.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던 형이 어느 순간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 사랑하던 아버지가 어느날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면 살인자가 됐구나 그냥 그렇게 여기면 되는 것일까? 남들처럼 사람을 죽이고 살인자가 되었으니 욕하고 비난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면 되는 것일까? 그럼에도 아버지이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자신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다. 형을 잃은 가엾은 동생을, 아버지가 졸지에 살인자가 된 가련한 딸인 자기를. 

처음 한재광이 김윤혜를 보던 그 순간이 그랬다. 그에게는 형을 대신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자신을 대신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사랑해야 했고 연민해야 했다. 그리워해야 했고 동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김윤혜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베풀고 싶었던 감정이었다. 한재광을 사랑함으로써 그가 베푸는 감정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한 순간이나마 외로움을 잊고 싶다.

그래서 사랑을 한다. 그래서 사랑을 하고, 그래서 사랑을 부여잡으려 하고, 그래서 집착하고, 그래서 상처받고, 그래서 절망하고 좌절한다. 한재민이 결국 강목수(김영재 분)과 사랑의 도피를 결심한 이유였다. 사랑하기에. 그런 자신을 사랑하기에. 그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그것은 어머니 신여사의 소유였던 자신에게서 유일하게 자신의 몫으로 남아 있던 온전한 자신의 것이었다. 오히려 신여사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기에 더욱 그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게 된다. 아마 신여사가 아니었다면 한재민 역시 여느 사람처럼 그저 만나고 사랑하고 서로 어우러지다가 어느 순간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가는 평범한 삶을 살았겠지. 아마도 강목수에게 남은 미련처럼. 신여사에게 남은 집착처럼. 이제 비로소 사실을 알게 된 한재광의 원망처럼.

신여사 역시 그래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신여사 자신도 상처투성이 인생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좌절과 굴곡이, 수도 없이 패이고 찢겨 일그러진 그녀 자신의 기억이 그렇게 잘난 아들 한재민에게 집착하도록 했을 것이다. 한재민의 완전무결함을 믿었고 그것에 집착했다. 그래서 또 다른 아들 한재광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김윤혜의 말대로다. 어머니가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 진정 미워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니까 미워한다. 역설이지만 그것이야 말로 인간이 갖는 가장 큰 비애 가운데 하나다. 어째서 자비라 할 때 비를 슬플 비(悲) 쓰는가? 인간은 슬픈 존재이며 그래서 연민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래서 신여사는 여전히 - 아니 지금에 와서 더욱 아들 한재민의 완전무결함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 단 한 점의 흠집도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 아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 또한 한 점의 작은 흠결조차 있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더욱 살인자인 김주평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 그 가족에 대해서까지 증오를 내보일 수밖에 없다.

"죽지도 않았을 거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더 지옥인 거야. 형이 그런 원망을 갖고 구천을 떠돌 테니까. 다 알고 나면 너도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그런데 아냐!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죽인 놈 따로 있는데 그게 왜 나 때문이야? 김주평 그 쳐죽일 놈 때문이지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아니라면 그녀 자신의 잘못이 될 테니까. 아니라면 이제까지의 그녀 자신이 틀린 것이 될 테니까. 그것을 차마 감당하지 못한다. 아들을 사랑했는데 그 아들에 대한 사랑이 정작 아들을 힘들게 했다는 것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했다는 것을. 어쩌면 자기에게 책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오히려 그것을 스스로 알고 있고 깨닫고 있기에 더욱 부정할 수밖에 없다. 더욱 부정하고 오로지 김주평만을 원망하고 그 가족만을 증오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김주평이 아닌 다른 사람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내장이 내려앉는 것 같다며 그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제까지 그렇게 원망하고 증오해 왔는데 그것이 틀렸다는 말일까? 이제 와서 그러면 또 다시 누구를 원망하고 증오해야 하는 것일까? 7년이란 오히려 지독스럽기에 그 모든 감정들이 지치고 마모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더 이상 누군가를 원망할 힘도 증오할 기력도 없다. 다친 다리처럼 그녀는 오랜 상처를 끌고 현재를 버티고 있을 뿐이다.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채. 그렇게 버티고 의지하며. 사랑하며. 원망하며. 증오하며.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한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그래야 견딜 수 있으니까. 그 힘겨운 시간들을 버티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 삶이라는 가장 가혹한 기만을 버티며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누군가 내밀어주는 손이. 누군가에게 내미는 손이. 그로부터 전해지는 감정의 온기가. 설혹 그것이 착각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사랑을 하고, 그래서 사랑을 하고 싶고, 그래서 더욱 보고 싶고, 만나게 되고, 함께 하게 되고,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된다. 보통의 사랑을 하게 된다.

어떤 구원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안식과 같은 쉽고 편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발버둥이다. 진흙탕에 빠져 헤어나오고자 발버둥치는 추한 몸짓이다. 그래서 살아야 한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사랑이란 그렇게 처절하다. 인간이란 그렇게 처절하다. 그래서 인간은 아름답다. 얼마든지 추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추해서 아름답다.

참으로 우울한 이야기가 아닌가. 내내 보면서 가슴이 먹먹하다. 어째서 사람이란 이렇게 가련한 존재인 것일까? 어째서 이렇게 가엾은 존재인 것일까? 그런데도 그것이 너무나 대단해 보인다. 그럼에도 사랑을 믿고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대단해 보인다. 그래서 우울하지만 벅차오른다. 희망이란 가장 큰 절망 속에 있다. 그래도 그들은 살아간다.

반전이라면 반전일 수 있을 것이다. 이제껏 아버지는 범인이 아니라 믿어 왔었다. 그래서 한재광 역시 김윤혜을 쫓아 그렇게 믿고자 했었다. 그런 것처럼도 보였다. 까페 여주인과 강목수의 존재로 인해. 그들로부터 보여지는 어떤 의혹들로 인해. 어쩌면 김윤혜의 아버지 김주폄응 실제 범인이 아닌 것은 아니지 않을까? 김윤혜는 원래 살인자의 딸은 아닌 것이 아닐까? 한재광 역시 형을 죽인 살인자의 딸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지 않을까? 그런 간절한 기대가 있었다. 믿고 싶은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삶이란 그렇게 믿고자 한다고 믿고 싶은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때로 인간의 믿음을 배반한다. 아니 대부분의 경운 삶이란 인간을 배반한다. 그래서 살아간다. 삶으로부터 배반당하며. 기만당하며. 상처입으며. 상처투성이가 되어서도. 그래서 더욱 발버둥치고, 그래서 더욱 악착같이 매달리고, 그래서 더욱 사랑을 한다. 삶이란 잔인하다. 사랑이란 또한 잔인하다. 드라마는 그런 삶을 보여준다. 반전 아닌 반전을 통해. 마치 배반과도 같은 사실들을 통해. 마치 실제로도 그러한 듯.

드라마를 보고 있는 자신도 허탈할 정도 배신감을 느끼는데 당사자들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어이없을 정도로 우습고 허무한데 당사자들이 느끼는 감정이란 어떠할까? 삶이란 그래서 비극이면서도 희극이다. 예고없이 찾아온다. 비극도, 희극도, 삶도. 사랑도. 예정되지 않은 구성이야 말로 그런 점에서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을까. 예정되지 않은 진실이야 말로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였을 것이다. 드라마가 우스워졌는데 삶은 더 우습다. 그런 삶을 보여준다. 절절하게 저미도록. 눈물겹도록.

감정이 깊어진다. 드라마에 이입한 자신의 감정 또한 깊어진다. 연민하고 동정한다. 안타까워하면서도 응원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아로새긴다. 이것으로 좋은가? 내가 한재광이었다면. 내가 김윤혜였다면. 그러나 나는 한재광이며 김윤혜다. 아마도 기억을 떠올린다.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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