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3.06 09:23

빛과 그림자 "검찰이 가장 싫어하는 죄가 뭔 줄 알아? 괘씸죄야!"

권력이 법을, 폭력이 정의를 대신하던 야만의 시대, 현재와 이어지는 그 기록을 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존엄이란 곧 존경이다. 존경이란 두려움이다. 두려워하기에 존중한다. 거리낌이 있기에 삼가고 조심한다. 두려움이 없는데 존중하거나 존경하는 경우란 없다. 1971년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실시된 저 유명한 감옥실험의 결론 가운데 하나다. 일방적인 관계에서 존엄이란 없다. 오로지 일방적인 가학과 피학의 관계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느 가수의 회고가 떠오른다. 밖에서는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인기가수였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동안에는 전혀 아니었다. 그 모욕과 굴욕감을 잊을 수 없었다. 그가 다시는 대마초를 하지 않겠다 결심한 이유라고 했다.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그대로다. 조롱하며 폭행하고 모욕하며 억압하고.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함부로 대한다. 연예인조차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굳이 연예인이라서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연예인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대부분은 TV나 아니면 특별한 기회를 통해서나 겨우 한 번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구름 위의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하늘 위의 별 - 스타라 불렀다. 동경의 대상이었고 우러름의 대상이었다. 아마 자신들 또한 그들의 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겁먹은 눈으로 잔뜩 움츠러 있다. 무엇을 해도 감히 반항할 생각도 못한다.

그것은 대단한 쾌감이다. 악플러가 유명인과 관련해서 악플을 다는 심리일 것이다. 자칭 네티즌이 유명인에 대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그들을 비판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그것과 같을 것이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더라도 일방적인 우위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면 쾌감을 넘어 사명감까지 느끼게 되는데 하물며 평소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든 대단한 사람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바로 내 발밑에 있다. 더구나 아무도 자신들의 행위를 제제하지도 간섭하지도 않는다.

보라. 바로 직전까지 그토록 야비하게 유채영(손담비 분)을 모욕주던 같은 경찰이었을 터다. 그런데 정작 장철환(전광렬 분) 앞에 섰을 때 그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장철환에게서 유채영에게 힘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그들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변호사가 입회한 상태에서만 심문에 응하겠다는 법이 보장한 피의자의 당연한 권리마저 비웃던 당당한 경찰이건만 그러나 장철환의 말 한 마디에 자백까지 마친 최성원마저 무죄로 풀어주고 만다. 심지어 유채영은 돌아서는 경찰의 뺨까지 때리고 있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전형적인 비루함이다.

그것은 야만이다. 인간의 존엄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아마 경찰 자신도 스스로를 존엄하다 여기지 않을 것이다. 피의자에 대한 경멸이 자신에 대한 경계마저 허물어 버린다. 오히려 그런 자신에 쾌감마저 느낀다. 피의자를 폭행하고 모욕주고, 그럼에도 전혀 반항하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에서 우월감마저 느끼게 된다. 하물며 그 피해자가 무척이나 대단한 사람이라면. 비루함이란 바로 자포자기에서 나온다. 자기 자신조차 존경하지 못한다. 존중하지 않는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바로 그런 시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인간에 대한 거리낌이 없다. 오로지 있는 것은 힘과 서열 뿐이다. 누가 더 강한가? 누가 더 우위에 있는가? 장철환의 말 한 마디에 유채영의 무죄가 결정된다. 경찰이 직접 수사하고 자술서까지 받아냈건만 최성원 또한 무죄로 풀려나고 만다. 대신 강기태(안재욱 분)에 대해서는 미처 수사가 끝나기도 전에 차수혁(이필모 분)에 의해 유죄가 확정되어 검찰로 넘겨진다. 법이란 없다. 권력이 법을 대신한다. 폭력이 정의를 대신한다. 그에 길들여져 있다. 인간이라고 하는 보편의 가치를 배우기도 전에 폭력의 논리에 먼저 길들여져 버렸다.

하기는 그러니까 장철환에 의해 강기태의 아버지 강만식은 죄도 없이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사 강기태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도 감히 복수는 꿈도 꾸지 못하도록 철저히 응징하면 그 뿐이다. 중앙정보부장 김재욱(김병기 분) 또한 그래서 힘의 논리로 강만식의 죽음을 덮고 경찰에서 수사중인 피의자 강기태를 빼내려 하고 있었다. 적법한 절차 없이 필요와 효율을 위해 억압과 강제를 행하는 그 모습이야 말로 당시의 현실이었을 것이다. 인간도 인권도 인격도 없이, 상식도 원칙도 없이 휘둘러지던 무도한 권력의 실체였다.

대마초파동이 그렇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단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예고조차 없었다. 적법한 절차도 없었다. 합리적인 원칙도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를 그리워한다. 인류사회의 오랜 숙제일 것이다. 가장 민주화된 미국에서조차 일단 피의자를 잡고 공포와 고통으로써 자백을 강요하는 내용의 영화가 인기를 모은다. 당장 강기태마저, 이번 회에서도 강기태를 따라다니는 양동철(류담 분)이 강기태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시도에 대해 가장 먼저 폭력에 의지해 응징하려 하지 않는가 말이다. 사실확인이 되기도 전에 먼저 악플을 쓰고 게시물을 통해 여론재판부터 하고 보는 인터넷의 모습도 그래서 닮아 있다. 역시 <빛과 그림자>란 끝나버린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렇게 당시의 권력과 지금의 대중의 모습은 너무나 닮아 있다.

아무튼 최악의 위기일 것이다. 대마초에, 더구나 한지평의 죽음과 관련해 조직폭력배 수괴죄라는 무거운 죄까지 걸려들었다. 법이라도 믿을 수 있으면 그것에 기대 볼 텐데, 그러나 법은 권력의 편이다. 출세를 위해 법을 배운 검찰은 철저히 출세를 위해 법을 이용하려 든다. 아니 이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파괴하는 것이다. 법의 정의를 무시한 채 권력의 의지만을 쫓는다. 한지평의 죽음에 대한 혐의까지 강기태에게 씌워진다. 이것은 헤어날 수 없다.

통쾌하다면 결국 강기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노상택(안길강 분)도 함께 걸려들어가 버렸다는 것. 역시 바로 권력이 갖는 묘미다. 저항할 수 없는 상대를 비트는 것은 본능이 가르쳐주는 쾌감이다. 더구나 그 너머에 큰 이익이 있다. 지금껏 그를 보살펴준 은인이라 할 수 있는 강만식까지 배신한 조명국(이종원 분)이다. 장철환에게 노상택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조차 아니다. 버러지처럼 이제까지의 노력이 무색하게 무참하게 버려지고 만다. 비정하고 비열하지만 그 대상이 노상택이다 보니 간만에 후련하기는 하다. 감옥에서 나오게 되면 조태수와 노상택 모두 장철환과 대결하려는 강기태에게 힘을 더하게 될까?

강기태란 참 바보같은 캐릭터다. 소리장도라고 웃음 뒤에 칼을 숨기는 법을 모른다. 느물거리면서도 뒤로 칼을 가는 김재욱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다. 오히려 그는 장철환과 닮았다. 차수혁이 아니었다면 장철환은 절대 김재욱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김재욱과 함께 죽는다. 장철환이 강기태를 유독 의식하는 이유일 것이다. 두 사람은 닮았다. 빛과 그림자. 그에 비하면 고민하면서도 손을 쓰는데 있어서는 과감한 차수혁의 모습은 정치인의 그것이다. 섣부르게 차수혁을 건드린 탓에 위기를 자초하고 만다.

과연 차수혁과 장철환을 찾아나선 이정혜(남상미 분)와 유채영의 의도는 성공을 거둘 것인가? 사정을 봐 줄 처지가 아니다. 작심하고 칼을 빼들었다. 칼을 빼든 이상 적을 죽여야 한다. 강기태를 죽여야 한다. 어머니의 전화마저 무시한 차수혁이다. 장철환이 이제 와서 굳이 유채영을 위해 그런 양보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하나의 계기는 될 수 있으리라.

보면 볼수록 요즘을 닮았다. 몰상식하고 비열하고 야만적이다. 그것이 상식이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답답하지만 그것이 현실인 것을 안다. 오히려 강기태가 지금껏 멀쩡할 수 있다는 자체가 하나의 기적일 것이다. 그래서 결국 조직폭력배라는 누명까지 쓰고 감옥에 갇힌 것일 테지만. 가장 정의로운 권력에 대해서. 과정조차 번거로울 정도로 그들은 정의롭다.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영화 <부러진 화살>을 떠올린다. 검사가 가장 싫어하는 죄가 괘씸죄다. 법에 대한 불신을 이야기한다. 사법부를 불신하는 영화가 크게 히트한 이유가 비단 영화의 소재가 된 그 사건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그 사건에 대한 진실여부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이다. 역시나 뿌리깊다. 바로 얼마전 우리의 모습이었다. 지금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프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