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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3.05 17:26

악역론 "인간과 인간 사회의 모순, 죄와 악이라고 하는 자화상을 보다!"

작품에서 악역이 더욱 주제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사람의 죄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인간이 처음으로 죄를 저지르는 과정을 다룬 구약의 창세기에 어쩌면 그 답이 있을 것이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고 에덴동산을 허락했으며 선악과를 금지했다. 그리고 인간은 신의 뜻을 어기고 선악과를 범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창세기는 인간사회에서 죄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는 근본적 모순과 구조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아라크네가 아테나로부터 저주를 받아 거미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 시지푸스는 어째서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을까? 고결하던 영웅 맥베스가 타락하여 악인이 되는 과정을 떠올려 본다. 무엇이 그토록 맥베스를 타락한 존재로 전락시킨 것일까?

인간사회란 대개 금기에 의해 유지되고 운영된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남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된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을 때려서도 안된다. 도로에서는 과속해서는 안된다. 차선을 함부로 변경해서도 안된다.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신하는 왕에게 충성해야 한다. 부하라면 상사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법이고 도덕이고 윤리다. 문제는 인간이란 원래 욕망하고 충동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본능이 시키는대로 충동하며 그 충동에 이끌리고 만다.

창세기의 하와가 그랬다. 신은 그녀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리고 호기심이라는 것도 주었다. 그러면서 볼 수 있는 곳에 선악과를 두고 그녀로 하여금 그것을 범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차라리 선악과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몸으로 고생하는 쪽이 하와에게도 더 행복한 선택이지 않았을까? 그녀의 자유의지가 문제였다. 그녀의 호기심이 문제였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금기로 강요되던 것이 문제였다.

신의 사랑은 아벨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카인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인은 아벨이 받고 있던 신의 사랑을 탐냈다. 아라크네는 신에 대한 공경보다 자신의 베짜기 실력에 대한 자신감을 앞세웠고, 시지푸스 또한 신을 농락하며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원래 맥베스는 왕이 될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세 마녀의 예언을 접하는 순간 그는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왕의 자리를 탐내게 된다.

물론 악인 가운데에는 원래 사람이 악해서 악을 저지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아고가 오셀로를 속여 그로 하여금 데스데모나를 죽이게끔 모략을 꾸미는 것은 결국 오셀로가 무어인이기 때문이었다. 오셀로가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의심하고 마침내 자기 손으로 죽이게 되는 것도 그가 베니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어인 출신의 장군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혐오와 경멸, 그럼에도 그가 자신보다 높은 곳에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데 대한 근본적인 증오와 질시. 결코 자신에게 허락될 수 없는 것을 마침내 누리게 된 데 따른 의심과 열등감. 사람을 속이고 타락케 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은 죄지만, 아마 이아고와 오셀로도 그것을 알았을 테지만, 그러나 그들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충동은 어느새 그 죄를 잊게 만든다. 범하게 만든다.

사실 지금도 여러 사회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모습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존재가 마침내 성공하여 다른 사람의 위에 서게 되었을 때, 그를 향한 질시나 혐오, 경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독한 악취를 뿜어내게 된다. 그 자신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성공에 취하고 그리하여 의심하며 그로 인해 더 큰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아손이 악했던 것인가? 오셀로가 어리석었던 것일까? 그보다는 단지 그들은 너무나 자신의 충동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충동을 이겨내기에는 그들은 너무 나약했다. 최초의 카인이 그러했듯. 그들이 죄를 저지르고 마는 이유다. 악을 품게 되는 이유다.

당장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 장철환이 강기태의 아버지 강만식을 죽이게 되는 장면이 그렇다. 장철환에게는 권력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강만식 정도는 얼마든지 몰락시킬 수 있는 너무나 강력한 힘이었다. 조명국도 장철환이 가진 그 힘을 보았다. 차수혁 또한 장철환이 가진 그 힘에 이끌렸다. 만일 당시 사회가 그러한 장철환의 폭주를 제어할 수 있고 견제할 수 있는 사회였다면 장철환은 굳이 강만식을 상대로 그렇나 비열한 모략을 꾸몄을까? 장철환이 없었다면 조명국 역시 자신의 복수를 조금은 더 뒤로 미뤘을 것이다. 차수혁은 가장 나중까지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었다.

<샐러리맨 초한지>에서의 모가비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째서 십수년을 모시던 자신의 상사인 진시황 회장을 죽이려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을까? 자신의 의도가 진시황 회장에 의해 들통나자 그녀는 궁지에 몰린 나머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진시황 회장을 죽이고 만다. 진시황 회장을 죽일 때도, 그를 죽이고 유언장을 대신 작성할 때도 그녀는 분명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분명 그녀로 하여금 그같은 선택을 하도록 강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토록 진시황 회장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음에도 고작 외손녀에 의해 '비서실장'따위로 여겨지는 현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외손녀가 단지 혈연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 그것은 억울함이다. 분노다. 서러움이다. 그녀가 놓이 현실의 모순이다.

그래서 <난폭한 로맨스>에서는 오히려 스토커로 마침내 그 정체가 밝혀진 가정부 양선에 대해 연민하고 동정하게도 되는 것이다. 꿈많은 문학소녀였다. 그녀는 단지 사랑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마녀의 사랑이 되고 말았다. 동화속의 아름다운 공주님의 사랑이 아닌 추악한 마녀의 사랑이 되어 버렸다. 무엇이 그토록 그녀를 뒤틀리게 만든 것일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토록 일그러진 삶을 살도록 했던 것일까? 고재효 기자의 취재를 통해 그녀의 아픈 과거가 드러난다. 그녀는 역시 여전히 약하디 약한 한 소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악인 아닌 악인이, 그리하여 죄를 저지른 죄인이 되게 한다.

창세기에는 교훈이 있다. 어찌되었거나 하와는 신이 정한 금기를 어겼다. 죄를 저질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죄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이다. 여기까지가 흔히 말하는 교훈의 영역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자유의지를 보고 호기심을 보고 금기에 대한 억압을 본다면 하와를 원망하기보다 동정하게 된다. 연민하게 된다. 그리고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어쩌면 신은 인간이 비로소 에덴동산이라는 자궁을 벗어나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에 에덴동산에서 쫓아내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허락한 것이 아닌가. 신은 인간의 품에서 벗어났다.
 
어쩌면 하나의 작품에서 가장 그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악역이 아니겠는가. 그가 저지른 죄를 통해 금기를 보고, 그가 갖는 악의를 통해 그럼에도 그것을 가지고자 하는 충동을 본다. 그것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비극에 공감하고 그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그래서다. 비극 속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시련과 좌절은 모두가 겪고 있고 혹은 겪게 될 것이라 두려워하는 것들이다. 그들이 사는 현실의 모순을 담아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또한 비극이란 사회비판적인 성격을 갖는다. 코미디 또한 그러한 비극을 통해 사회를 통렬히 비웃는다. 죄란 다른 멀리 어디선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회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필자가 유독 악역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악역이라 해서 비난만 하지는 않는다. 그들을 원망하거나 혐오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오히려 연민하고 가엾이 여긴다. 어째서 그들은 악을 가슴에 품게 되었는가? 죄를 저지르게 되었는가? 대부분은 그러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 자신이 가진 악을,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감당하지 못해 끝내 타락하고 만다. 타락하는 자신이 싫어 더욱 타락하고 만다. <공주의 남자>에서 신면이 그랬다. <빛과 그림자>에서 차수혁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결하던 맥베스가 누구보다 타락한 존재가 되고 마는 까닭이다. 인간인 탓이다. 인간 사회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자 한다.

아무튼 원래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든 작가란 지식인으로 많은 사회적 존경을 받고 있었다.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다. 많이 팔리는 작품을 써내서가 아니다. 많이 팔리고 재미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또한 그 사회 일반의 내재된 충동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뜻이 된다. 말한 공감이다. 작품속 악역이란 그 역할을 맡는다. 작품속 악역들이 오히려 주인공보다 더 적극적이고 더 능동적인 경우가 많은 것은 그래서다. 그들이 주제를 담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미있게 읽는다.

가끔 거울을 보면 혐오스러울 때가 있다. 나 자신을 돌아봤을 때 부끄럽고 한심한 경우가 많다. 악역이란 그와 같다. 악역이란 인간의 거울이다. 인간의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전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나 자신이다.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갖는 내면의 추악함이다. 그것을 보여준다. 악역이 설득력을 가질 때 더욱 그를 혐오하게 되고 증오하게 되며 작품은 더욱 재미있어진다. 반발하면서도 그에 이끌리게 된다. 주제가 선명해진다. 깊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선하다. 선량하려 한다. 그래서 변명을 한다. 말을 꾸민다. 악인 또한 마찬가지다. 죄를 저지르고서도 사람들은 얼마든지 자신의 죄를 치장한다. 인간의 악이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어째서 인간은 죄를 저지르는가? 인간은 가장 선량한 존재다. 가장 지독한 역설일 것이다. 아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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