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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3.04 12:02

불후의 명곡2 "한국 대중음악의 위대한 거장 박춘석을 추모하다!"

전통의 대중가요를 한 단계 끌어올린 천재 작곡가를 함께 되새기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언제부터인가 트로트라고 하면 낮춰보는 것이 유행이 되어 버렸다. 하긴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적 트로트란 흘러간 노래다. 구닥다리 음악이다. 보다 새로운 선진적인 해외의 음악에 매료되어 살았다. '뽕끼'란 한국대중음악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자 한계였다.

하지만 지나면서 깨닫게 된다. 역시 사람이 어울리는 자리에서는 트로트 한 곡 나와 주어야 맛이지 않겠는가. 많은 한국인들에 내면화된 서러움일 것이다. 서러움이란 슬픔과는 다른 감정이다. 우울함이나 외로움과도 전혀 다르다. 서러움이란 억울함이다. 억울한데도 자기를 탓하는 것이다. 헤집고 파헤쳐 오히려 슬픔을 잊는다. 베어내고 도려내어 그 아픔마저 신명으로 승화시킨다.

신명이란 기쁨에서 오지 않는다. 즐겁거나 행복해서 신명에 이르지는 않는다. 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벅차도록 가득 쌓인 슬픔이 마침내 한 바탕 춤사위가 되어 펼쳐진다. 노랫가락에 실려 춤사위와 함께 올올이 풀려나간다. 그래서 신명이다. 흑인음악에서 말하는 소울이다. 그렇게 내 안의 신과 내 밖의 신이 만나며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전통음악이고 근대 이후에는 트로트가 맡았던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 박춘석이 있다.

신중현은 미8군무대를 통해 미국의 록과 블루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세시봉에서는 미국의 포크음악을 내면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동시대에 박춘석은 이미 내면화된 한국의 대중음악인 트로트를 안으로부터 채워가고 있었다. 클래식과 스탠다드, 혹은 다른 서구의 대중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그러면서도 전통의 국악과도 닿아 있던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트로트였다. 고급화된 '음악'으로서의 트로트였다. 새로운 트로트 음악이었다.

지금도 박춘석의 음악을 들으면 전혀 촌스러운 느낌이 없다. 그의 치열한 음악에 대한 추구와 노력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가수들이 단 한 음이라도 마음대로 부르는 것을 용납지 않은 엄격함, 그의 안에서 이미 자신의 음악이란 완결되어 있었던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한 시대의 한국 대중음악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도 다른 이들과 한 차원 다른 음악을 들려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서민적이지만 가장 완고했다. 한꺼풀 벗기고 나면 가장 세련되고 가장 고급스럽다. 노래란 결국 가사이고 멜로디이며 그를 통해 작곡가는 대중과 만난다.

임태경이 부른 '바닷가에서'는 차라리 클래식의 성악곡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알리가 부른 '가시나무새' 역시 국악으로 시작해서 성악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가사와 멜로디에 충실하려 할 때 강민경의 '공항이별'은 보다 스탠다드적인 감성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노래라는 듯이. 시간이 흘러도 멜로디와 가사가 주는 감동은 퇴색하지 않는다.

태민의 '마포종점'과 성훈의 '물레방아 도는데', 그리고 노브레인의 '섬마을 선생님'과 박재범의 '빈잔'은 트로트라고 하는 음악이 갖는 원점을 되짚지 않았을까? 트로트라는 말 자체가 원래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유행하던 폭스트로트라는 춤곡에서 나왔다. 트로트를 일컫는 비칭인 뽕짝 역시 2박자 리듬을 연이어 붙인 춤곡 특유의 경쾌한 리듬에서 비롯되었다. 말한 신명이다. 노래는 슬프고 가수의 목소리는 구성진데 어느새 잊게 만드는 신명이 그 안에 있다.

말 그대로 사람이 모이면 흥을 더하느라 부르는 노래가 바로 트로트인 것이다.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놀려 할 때면 누군가 트로트를 불러 흥을 채워주어야 한다. 그리고 트로트란 록과 함께 밴드의 연주에 맞춰 클럽에서 불려지는 노래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트로트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신명나게 놀고 있었다. 그저 귀로 듣고 감상하는 노래가 아니었다. 임태경과 강민경과 알리가 듣는 노래로서의 트로트의 진가를 보여주었다면, 태민과 성훈, 노브레인, 박재범은 함께 어울리며 즐기는 트로트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트로트란 신명이다. 그러면서도 노래다.

박재범의 재능이 놀랍다. 설마 '빈잔'을 그렇게 편곡해 부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재미교포 3세라는데 그도 역시 한국인이었다. 한국인만의 뽕끼와 아마도 미국에서 내면화했을 소울이 절묘한 접점을 이룬다. 창인 듯 트로트였고, 소울인 듯 알앤비였다. 힙합이기도 했다. 빈잔의 가사와 너무나 어울리는 안무는 용그림에 찍은 하나의 점일 것이다. 노래가 날아올랐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누워버리는 그 모습에서 박재범이 진정 이 노래를 이해하고 있구나 깨닫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베스트. 재주가 많은 친구다.

어쨌거나 여전히 대기실에서의 가수들의 왁자한 어우러짐이 즐겁다. 사소한 농담들이 오고간다. 심각하지 않다. 심각한 듯 어느새 김구라와 문희준을 중심으로 서로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한 바탕의 즐거운 어우러짐을 만든다. 동료가수가, 선배와 후배가 그렇게 음악을 통해, 무대를 기회로 서로 만나고 어울린다. 임재경과 태민의 공동 1위는 그런 점에서 의미가 깊지 않은가. 순위란 사실 의미가 없다. 우승자는 있지만 순수하게 그 순간을 즐긴다.

아무튼 참 좋은 기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불후의 명곡2>가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젊은 세대에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음악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뿌리일 테지만 어느새 잊혀지고 있던 노래이고 음악인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2주기를 맞아 그것도 토요일 예능시간대에 젊은 가수들을 통해 들려주고 있었다. 지금에 맞게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입혀 익숙하게 들려지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 바로 이것이 음악의 힘이 아니겠는가. 알리와 페티김이 닮았다는 말에 무릎을 치는 이도 있고 페티김이 누구인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모두가 <불후의 명곡2>를 통해 만난다.

매우 특별한 가치다. 90년 한국대중음악의 시간이 <불후의 명곡2>를 통해 서로 교차한다. <나는 가수다>는 마침내 한계를 맞아 끝나고 말았지만 <불후의 명곡2>는 오히려 탄력을 받아 더욱 그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가수와 노래의 차이다. 가수는 유한하지만 노래는 무한하다. 단지 가수는 노래를 부를 뿐. 가수만큼 뜨겁지는 않지만 가슴깊이 오래 간다. 이번처럼. 박춘석을 토요일 오후 예능시간대에 젊은 가수들과 어울려 들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다. 귀중한 기회였다.

다시 한 번 위대했던 작곡가를 떠올려 본다. 안타깝게도 필자 역시 그와 동시대는 아니었다. 문득 시간이 흘러 좋아하는 노래의 작곡가의 이름을 찾아보니 박춘석의 이름이 나온다. 가수도 가고 작곡가도 갔지만 노래를 기억하는 이가 있어 영원은 이어진다. 노래가 불리는 한 그는 죽지 않는다. 살아있다.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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