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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3.02 08:09

해를 품은 달 "왕 이훤의 절규, 그런 나는 가엾지 않은 것이오?"

원작과는 다른 민화공주, 눈물이 일말의 동정마저 지우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민화공주(남보라 분)의 캐릭터를 이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나마 8년 전 일을 따져묻는 오라비 이훤(김수현 분)에게 자기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느냐며 대들던 원작에서의 민화공주는 동정의 여지라도 있었다. 그녀는 어렸으니까.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고 그로 인해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알게 되었을 때는 후회와 죄책감 뿐이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다르다. 그녀는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다 알고 있다.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고,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그로 인해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그 모든 일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이 무엇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말한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하여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차라리 지금껏 그녀를 괴롭혀 온 양심의 고통마저 자신의 오롯한 사랑에 대한 댓가이며 희생이라 여기고 있다. 차라리 지옥불에 떨어지겠다. 동정할 여지가 있겠는가.

당시 민화공주 역시 13살 어린 나이였었다. 아직 세상을 알기에는 이른 나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잘한 것이고 무엇이 못한 것인지, 무엇이 죄이고 그 죄에 대한 책임은 무엇인지,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어른이 필요하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이끌 어른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런데 과연 당시 민화공주의 곁에는 누가 있었는가? 금지옥엽이라고 모두가 떠받들어주기만 하는데 미처 자아가 형성되기 전의 민화공주에게 할머니인 왕대비(김영애 분)의 유혹은 차마 거절할 수 없는 것이었을 터다. 항상 그녀의 말이라면 모두 들어주던 아버지 성조(안내상 분)마저 그녀를 외면하고 있는데 그녀는 과연 누구에게 의지해야 했을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실상 방치되어 있었다. 공주인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내시며 궁녀들은 말할 것도 없다. 왕과 중전을 대신해 그녀를 길러준 상궁 역시 결국 그녀의 아랫사람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아버지인 왕이 공주에게 따끔하게 어떻게 해야 한다 가르치기를 하는가. 중전 역시 공주가 아닌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그다지 신경써서 가르쳐준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를 바라기란 처음부터 무리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실을 깨닫고 비로소 죄책감을 가지게 된 그녀의 모습은 차라리 가련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드라마에서의 그녀는 모든 것을 안다. 당시에도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면서도 후회하는 가운데서도 그녀는 허염(송재희 분)을 택하고 있었다. 심지어 직접 친구가 되자 손을 내밀었던 허연우(한가인 분)의 죽음에 동참하고서는 그녀의 오라비인 허염을 속이고 그와 결혼하고 있었다. 오라비인 이훤이 다그치자 후회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여전히 그녀는 당당하기만 하다. 그런 그녀에게 만일 면죄부가 주어졌을 때 그녀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스스로도 미처 몰랐던 죄를 깨닫고 괴로워하던 원작에서와는 달리 그녀는 이미 죄를 알고 그것을 후회하면서도 여전히 기만하며 자신의 욕심만을 챙기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용서해야 할 이유를 필자로서는 알지 못한다.

하여튼 그래서 좋은 왕이란 좋은 사람일 수 없는 것이다. 성조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신하인 대재학을 아꼈고 그의 아들인 허염을 아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살리려 했다. 그들이 벌을 받지 않도록 지키고자 했었다. 딸인 민화공주는 아버지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천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충신이었던 그의 신하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고자 왕의 뜻을 꺾게 만들었고, 나라의 인재가 되었을 충신의 아들은 날개가 꺾인 채 하릴없는 세월만을 보내야 했다. 공주를 살리고 세자를 지켰지만 그로 인해 외척이 발호하여 백성을 피폐케 하고 장치 왕위에 오를 세자를 위협하게 되는 것을 방치하고 말았다. 그는 과연 좋은 왕이었는가?

차라리 성조보다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자 친딸마저 외면하는 윤대형(김응수 분) 쪽이 훨씬 권력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친혈육조차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용하고 심지어 희생시킬 수 있다. 윤대형이 왕인 성조마저 누르고, 그 뒤를 이은 이훤조차 위협하며 조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성조에게 만일 윤대형과 같은 집요함과 지독함이 있었다면 민화공주는 자칫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의 신하와 그 신하의 아들은 그 뜻을 꺾이지 않고 여전히 충신으로, 인재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윤대형의 외척세력도 없이 아들인 이훤은 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조가 유일하게 잘 한 한 가지가 다름아닌 아들 이훤에 대한 교육이다. 철저히 왕으로써 가르쳤다. 왕으로써 길렀다. 양명군(정일우 분)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며, 양명군의 모든 것을 빼앗아 오로지 적장자인 이훤에게만 주어가며, 왕이란 그런 것이다. 성조 역시 그의 아버지로부터 그같은 교육을 받았다면 그렇게 무르게 왕으로서의 자신의 권위조차 양보하는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딸이라도 벤다. 어쩌면 추측컨데 성조는 원래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왕으로서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다.

제아무리 이훤이 형인 양명군을 좋아하고 따르더라도 한 가지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다름아닌 왕인 자신의 것을 탐내어 욕심내는 것이다. 이훤 자신의 것만 건드리지 않으면 된다. 아니 양명군 자신조차 이훤의 것으로 남아 있으면 된다. 양명군도 그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자신이 바라는대로 살아도 좋다는 어머니의 말은 그것을 더욱 잔인하도록 일깨우고 만다.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는 오로지 이훤의 소유일수밖에 없다. 이훤을 죽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죽거나. 그러나 이훤을 죽이지 못했기에 자신이 죽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이훤이 허연우를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덮자고 한다. 오라비가 괴로워하고, 이훤의 누이로 인해 곤란할 것이니 선왕이 그랬던 것처럼 덮고 없었던 일로 하자고 말한다. 그녀는 정치가가 아니다. 권력자도 아니다. 권력과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는 그것을 아예 인식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훤과 다투지 않는다. 그녀는 단지 해를 품은 달로써 자신의 품 안에 있는다.

갈수록 허연우의 존재감이 희미해진다. 이훤이 왕이 되는 때문이다. 해가 떠 있다면 달빛은 가려질 뿐이다. 달빛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해가 기울어 빛을 잃었을 때 뿐이다. 달이 해를 품으면 그것은 일식이 된다. 한낮조차 빛을 잃어 어둡다. 제목이 그것을 이미 예고한다. 이훤이 왕인 이상에는 그녀는 단지 달에 불과하다. 달로 돌아가기 위해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달이 되면 볕이 밝은 낮에는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무색무미무취 아무것도 없는 한가인의 허연우는 그에 딱 어울린다. 원작에서도 그 무렵부터 허연우는 존재감을 잃기 시작한다.

아무튼 가장 왕다운 왕이었을 것이다. 동생인 민화공주를 사랑한다. 그녀를 아끼고 그래서 그녀가 지은 죄를 분노하면서도 연민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용서하지는 않는다. 허연우가 모든 것을 덮어두자고 말하고 있음에도 그는 그보다 오히려 자신을 더 연민한다. 허연우는 그의 것이다. 조선의 왕은 그의 자리다. 조선의 모든 것과 모든 권력은 그의 소유다. 민화공주를 연민하면서도 그녀로 인해 자신이 잃은 것을 애닲아하고 가엾어한다. 다만 그럼에도 그는 착한 왕이다. 성조가 허염을 민화공주와 엮어 날개를 꺾은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니었다면 이훤의 치세는 허염의 마음가짐에 달려있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하는 때가 온다면 친할머니에게 그랬듯 허연우도 단호히 내칠 수 있을까? 왕이니까.

어쨌든 역시 가장 불쌍한 것은 양명군과 중전 윤보경(김민서 분)일 것이다. 왕의 아들이었으되 이미 왕위에 오른 아우가 있으니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의 아들임에도 아들로서 한 번 인정받아보지 못했고, 오히려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과 자질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마음 붙일 곳이 없다. 종묘제례의 제주와 허연우를 원한다는 그의 말은 그의 본심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결코 자기에게 허락되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 그의 비극이다.

윤보경 또한 마찬가지다. 차라리 몰랐으면. 아버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더라면. 여전히 아버지의 딸이라 믿고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갈 수 있었더라면. 왕의 옆자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중전이란 원래 그녀의 자리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딸이라고 하는 원래의 자리조차 어느새 또다른 쓰임이 있는 누군가에게 빼앗기려 한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없다. 바라기는 했으되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떠밀리듯 그녀 또한 비극 속으로 빠져든다.

어떻게 해도 결국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드라마일 것이다. 양명군이 윤보경을 보쌈해 야반도주라도 하지 않는 한 결국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 또한 왕이라는 것이다. 양명군과 윤보경의 희생 위에 이훤은 허연우와 더불어 행복한 미래를 그려간다.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불가사리와도 같다. 이번에는 윤대형이 그 먹이가 되려 한다. 로맨스가 아닌 시대서사로서의 감상이다.

역시 허염에 대한 설이(윤승아 분)의 감정이 잘 살아나지 않는다. 설이가 허염을 마음에 깊이 새기게 된 이유가 있는데, 그리고 설이 나름의 허염을 사랑하는 방식이 있을 텐데, 그러나 어느것도 드라마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원작에서 가장 비장하면서도 애절한 최후를 보여준 이가 바로 설이였을 텐데,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조금 생뚱맞을 것 같다. 드라마라고 하는 아쉬움이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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