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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3.01 09:30

해를 품은 달 "조선의 왕 이훤, 다시는 기회를 탐하지 마십시오!"

탐욕스러운 군주 김수현과 양심에 쫓기는 긍지높은 김민서를 다시 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아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것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훌륭한 왕이란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왕이다. 관용적이고 금욕적이고 항상 다른 이를 위해서 고민하고 행동에 옮기려는 이타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대하면서 그 생각은 수정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훤(김수현 분)도 말한다. 나의 백성이라고. 나의 나라이고 나의 백성이다.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것이다. 몽골에 쫓긴 거란군이 고려를 침략해 왔을 때 당시 고려의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던 최충헌이 정작 거란군과 나가 싸우겠다던 자신의 문객들을 처벌한 것이 바로 그래서다. 그는 왕이 아니었으니까. 고려는 그의 나라가 아니었고 고려의 백성들은 그의 백성이 아니었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 역시 그런 까닭에 정작 몽골과 싸울 것을 결심하고서도 고려에서도 가장 정예이던 자신의 가병들을 전장에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는 당시 왕이던 고종의 나라였지 최씨정권의 나라는 아니었던 때문이다. 나라와 백성이 나누어지고 있었다.

어째서 탐관오리란 나타나는가? 내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나라도, 내 땅도, 내 재산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을 낸다. 그래서 가지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왕의 것이다. 나라의 것이며, 나라의 주인이 곧 왕이기에 왕의 것이 된다. 그래서 가장 부패한 왕도 탐관오리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었다. 가장 부정한 왕도 밑엣관리가 저지르는 부정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봉건제가 중앙집권제보다 나은 한 가지다. 봉건제 아래에서 영주들은 영지의 주인이지만 중앙집권제 아래에서 관리란 지역의 관리자다. 책임이 다르다. 인간은 자기것에 대해 더 철두철미하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 된다.

당장 윤대형(김응수 분)을 비롯한 외척과의 관계만 해도 그렇다. 그가 사람이 좋아 권력이란 나눌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면 굳이 윤대형이나 사적으로 할머니가 되는 왕대비 윤씨(김영애 분)와 굳이 번거롭게 척을 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적당히 양보하고 타협하며 자기 영역만을 지킨다. 윤대형이 권력을 가지고 어떤 부정을 저지르든, 왕대비 윤씨가 가진 권력이 나라 안에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든, 어쨌거나 장인이고 할머니이니 용납하여 눈감아준다.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자신의 나라이고 자신의 백성이니 온전한 왕 자신의 책임이 될 수밖에 없다.

사적으로는 이복형이다. 그리고 이훤은 자신의 이복형인 양명군(정일우 분)에 대해 깊은 연민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양명군에게 왕위를 양보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이훤의 왕위에는 이훤을 떠받드는 무수히 많은 개인들의 입장과 이해가 있다. 무엇보다 이훤 자신의 나라이고 백성이라 했을 때 양명군이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해 줄 것이라 누가 장담하는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양명군에게 왕위를 넘기는 행위는 자신의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만한 각오가 있다. 조선은 자신의 나라이고 자신은 조선의 왕이다. 조선의 모든 것은 왕인 자신의 것이다.

양명군에게 자신을 베라 한다. 진정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탐낸다면 자신을 베고 가지라 말한다. 아마 이훤이었다면 그는 기꺼이 양명군을 베었을 것이다. 양명군을 베고 양명군이 가지고 있던 왕이라는 자리와 왕을 따르는 운(송재림 분)등의 왕의 사람들과 자신이 사랑하는 허연우(한가인 분)를 차지하려 했을 것이다. 그는 조선의 왕이었으니까. 조선의 왕이어야 했으니까. 조선의 땅과 조선의 백성과 조선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어야 했으니까. 그럴 각오가 없다면 아무것도 욕심내서는 안된다. 조선의 하늘 아래 모든 것은 왕인 자신의 것이다.

왕으로 길러졌다. 그리고 왕을 섬기는 신하이기를 강요당했다. 사적으로는 이복형이되 공적으로는 이훤을 왕으로 섬기는 신하다. 그에게는 그런 각오가 없다. 그런 다짐이 없다. 그래서 구걸한다. 당당히 자신의 것이라 여겨 지키고자 하는 이훤에 비해 양명군의 간절함은 비굴하기까지 하다. 양명군이 이훤을 죽이지 못하는 이유다. 그는 왕이 될 수 없다. 설사 왕이 된다 해도 그는 자신이 거스른 운명을 내내 가슴에 품고 의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름이 돋았다. 김수현이란 참 좋은 배우구나. 그 순간 그는 왕이 되어 있었다. 누구보다 탐욕스러운 왕이. 누구보다도 이기적인 왕이. 모든 것은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허연우도, 운도, 심지어 자신의 자리와 여인을 탐내려는 이복형 양명군까지도.

자신과 양명군 사이에서 고민하는 운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자신의 목욕탕에서 그 고뇌를 씻어내라 말한다. 양명군과 마주해서는 잔인하도록 그의 앞에 놓인 현실을 일깨운다. 자신은 왕이며 양명군은 단지 그의 신하일 뿐이다. 이복형이지만 그는 단지 왕의 신하일 뿐으로 그가 가지고자 하는 모든 것이, 심지어 그가 이미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마저 왕인 자신의 소유로 있다. 거부하려면 반역하라. 반역하지 못할 것이면 인정하고 받아들이라. 양명군조차 그는 놓으려 하지 않는다.

하기는 그런 왕이니까 불리한 가운데서도 윤대형과 그 일파와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 게다. 할머니인 왕대비 윤씨와 마주하면서도 혈육의 정보다는 왕으로서의 권위와 책임을 앞세운다. 아마 허연우조차 자신을 거스르려 한다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베지 않을까. 끝내 이훤을 베지 못하는 양명군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세계다. 왕은 하늘이 내린다는 말이 맞다. 왕이라는 자리가 갖는 권위와 책임은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튼 덕분에 왕대비 윤씨가 실언을 했다. 순리를 따르라. 세자 때는 통했다. 세자는 왕이 아니니까. 그러나 왕은 순리조차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왕이 말이라 하면 사슴도 말이 된다. 왕이 은어라 하면 은어가 되고 묵이라 하면 도루묵이 된다. 죽이라 하면 죽는 것이고 살라 하면 살게 된다. 그것이 순리다. 이훤은 왕이다. 그런데 그 왕에게 순리를 따르라 협박하고 있다. 더 이상 할머니와 손자가 아니다. 왕과 그를 거스르려는 역도의 무리다.

허연우와 자신을 노리는 자객들을 향해 양명군이 칼을 뽑아 달려들고 있다. 그리고 부상을 입었다. 왕으로서 사랑하는 형의 부상에 분노하여 직접 칼을 뽑아들고 자객과 맞섰다. 그 순간 그는 충실한 형의 아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명군이 자신의 여자인 허연우를 데리고 사라졌을 때는 더 이상 양명군의 사랑스런 아우인 이훤은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것만을 탐하고 지키려 하는 왕이 있었을 뿐이었다. 차라리 광기마저 엿보이는 그 모습에서 전율마저 느꼈다. 왕이지 않은가. 허연우를 자신의 등뒤 밀실에 가둬두고 잠시도 잊지 못하는 모습에서 더욱 그런 것을 느낀다.

결국 이훤이 왕이 됨으로써 허연우의 캐릭터까지 모습을 달리하게 되어 버렸다. 이제까지 능동적으로 주체가 되어 행동하던 허연우가 왕의 등뒤 밀실에 갇혀 버렸다. 스스로 자신의 죽음에 관련한 진실을 쫓던 주체적인 모습에서 오히려 왕을 위해 진실을 덮으려는 순종적인 모습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왕을 사랑하는 것으로 족하다. 왕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으로 족하다. 이훤은 왕이니까. 왕이 있는데 허연우가 따로 전면에 나서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불경이다.

많이 아쉽다. 원작에서와는 달리 드라마에서는 허연우 또한 나름대로 역할을 하지 않겠는가. 이훤과는 또 다른 쪽에서 진실을 파헤치고 어긋난 것을 바로잡는다.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 캐릭터로 보여졌다. 그러나 결국은 이훤은 왕이었고 허연우는 단지 그러한 왕의 품안에 갇힌 달에 불과했다. 왕이라고 하는 해를 품에 안은 왕의 여자일 뿐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되어 버릴 것을. 조선이 배경인 이상 왕을 앞에 두고 여자인 허연우가 할 수 있는 건 그다지 없다.

설이(윤승아 분)의 롤이 상당히 애매하다. 하기는 운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에서는 문장으로써 다양한 깊은 감정을 묘사할 수 있었다. 그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드라마는 오로지 영상으로서만 보여진다. 과연 설이 허염(송재희 분)에게 품는 감정이나 현재 운의 입장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래서는 설사 설이 원작에서와 같은 결말을 맞더라도 크게 공감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설득력있는 개연성이 보여지지 않았다. 소설과 드라마가 갖는 차이다. 차라리 완전히 배제했으면 좋았을 것을 많이 애매하다.

양명군과 더불어 드라마에서 가장 가엾은 존재라면 역시 중전 윤보경(김민서 분)일 것이다. 차라리 그녀가 조금만 더 독하고 조금만 더 염치가 없었다면. 조금만 더 뻔뻔해서 자신의 양심마저 속일 수 있었다면. 그 절박한 상황에서조차 자신을 보고 실망할 아버지가 두려워 망설일 만큼 그녀는 여리고 약하다. 여리고 약해서 그녀는 중전의 자리를 탐냈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도 눈감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양심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온전히 외면하지 못한다.

쫓기고 있다. 막다른 궁지에까지 내몰리고 있다. 남편으로부터도 버림받고 아비에게조차 의지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없이 그 누구도 없이 그 모든 것을 감당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두렵고 초조하다. 무섭고 불안하다. 그럼에도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한다. 과연 그녀를 그런 막다른 지경에까지 내몬 것은 무엇일까? 아비인 윤대형일까? 남편 아닌 남편 이훤이었을까? 다시 살아돌아온 허연우였을까?

솔직한 심정으로 이제는 오히려 윤보경과 양명군을 더 동정하게 된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보다는 그나마 허연우의 비극에 대해 보다 깊이 빠져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허연우의 캐릭터가 어정쩡한 때문이다. 비극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고, 비극을 이겨내기 위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보다는 윤보경이 처한 상황이 더 비극적이고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것을 가지고도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하는 이훤에 비해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가지지 못할 그것들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양명군에 마음을 쓰게 된다.

어떻게 해도 드라마가 비극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훤과 허연우는 행복하겠지만 그것은 필연 양명군과 윤보경의 희생을 전제할 것이다. 이미 전제가 깔려 있다. 왕이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란 서로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서로가 책을 질투하고 허연우의 또 다른 이름인 월을 질투하는데 윤보경이 머물 자리란 과연 있겠는가. 이제 와서 윤보경을 악역으로 만들려 해 보아도 그녀를 그리 만든 것은 그녀를 그런 상황으로 내몬 주위일 것이다.

좋은 배우들이다. 탐욕스런 왕의 모습을 너무나 훌륭하게 매력적으로 연기해낸 김수현이나 막다른 궁지로 내몰린 나약하지만 긍지높은 한 나라의 왕후의 모습을 연기한 김민서나, 드라마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양명군의 연기도 탄력을 받고 있다. 보는 즐거움이 있다. 배우가 있어 즐겁다. 더욱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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